영원히 끝나지 않는 하루의 마침표, 영화<하루>를 보고

조선호 감독의 영화계 데뷔작인 <하루>는 연기파 배우 김명민과 변요한이 SBS TV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이후 출연을 결정한 타임루프를 소재로 한 단편 스릴러물이다.

 

주인공인 의사 준영(김몀인)은 박애주의를 실천하는 의사로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귀국길에 오른 준영은 딸과의 약속 장소로 향하던 중, 눈앞에서 딸이 교통사고로 죽는 장면을 목격하고 참혹한 심정에 빠진다.

 

그런데 눈을 뜨자 또 다시 귀국하는 비행기 안, 그리고 동일한 배경과 인물과 사건이 반복된다. 날마다 딸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아야했던 준영은 딸을 구할 수 있는 2시간의 기회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보지만 언제나 시간이 부족할 뿐이었다. 그러다 같은 사고로 아내를 잃은 구조대원 민철(변요한)도 같은 동일한 하루를 반복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둘은 각자 주어진 2시간 동안 딸과 아내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보는데........



영화<하루>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하루를 보는 다양한 시선과 관점의 전환이었다. 관객들은 준영의 경험치에 따라 하루를 보는 시야가 넓어진다. 처음에는 준영이 딸을 구해내기 위해 주어진 2시간 동안 어떻게 하면 시간을 단축하여 사고 지점에 도달 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 때만 해도 사고가 난 이유는 택시운전기사의 우발적 사고였다.

 

그런데 민철(변요한)의 등장으로 준영의 딸 구조 모티브는 또 다른 인물인 민철의 아내 미경을 함께 살리기 위한 관점으로 전환이 된다. 애초에 딸을 구해내기 위해 사고지점에 빨리 도착하는 미션에서, 민철의 아내가 사고 택시를 타지 못하도록 막는 것에 목표를 집중하게 된다. 이 때까지만 해도 영화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등장인물들의 창의적 문제해결 방안을 수립하는 일종의 게임과 같았다.

 

그런데 택시운전기사 강식(유재명)의 등장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시점은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빠져들게 된다. 혼돈스럽고 애매모호한 상황은 관객들에게 스릴러물의 강력한 보복과 응징 구조를 허물어 버리게 된다. 교통사고는 우연적 사고가 아니라 3년전에 있었던 사건이 계기가 된 계획된 범죄이자 유사 사건에 대한 보복 살인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치의 흠과 결점도 허락지 않는 도덕선생님의 잣대로 보면 등장인물 모두가 나쁜 사람들이다. 민철은 애초에 강철과 하루가 탄 차를 전복시키는 사고를 내고도 구조활동을 지연시켜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치게 한 빌미를 제공했고, 준영의 과오는 누가 보아도 명명백백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가 자신의 딸을 위해 의식 없는 환자의 서명을 도용하여 심장이식 수술을 감행한 것은 결코 용서 받지 못할 죄악이었다. 그렇다고 아무 죄도 없는 준영의 딸을 보복살인의 제물로 삼는 강식의 행위도 용납될 수 없는 범죄인 것은 분명하다. 먼저 법에 의한 심판을 청구했어야 한다.

 

그러나 법에 의해서 어떠한 처벌이 주어져도 이미 죽은 아들 하루는 살아 돌아올 수 없다. 또한 아들이 죽은 후 매일 매일이 악몽과 같았던 강식의 하루하루 시간들은 어디서도 보상받을 수 없다. 현행법은 피해자의 고통과 아픔을 보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사회와 질서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언제나 처벌은 범죄에 비해 솜방망이 같고 세력과 돈을 가진 자들에게 한없이 관대한 것이 사실이 아닌가?

 

어쩌면 고대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동해보복 원리야 말로 피해자와 가해자의 삶에 대칭적인 질서와 보상을 약속하는 명판결이 아닐까? 그런 의미로 보면 강식이 준영과 민철에게 행한 동일 형태의 범죄 행위는 악독한 살인자의 보복 범죄가 아니라 법과 도덕이 행하지 못하는 정당한 보복과 우주적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이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작품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로 달라질 수 있었다.



문제의 해결 방안은 등장인물의 성격과 세계관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성품의 준영은 강식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를 살리는 것을 통해 딸을 구출하는 방법을 해결방안으로 채택했다.

 

반면에 극단적인 감정 성향을 가진 민철은 사고 발생 이전에 강식을 제거함을 통해서 자신의 아내를 살리겠다는 목표로 강식을 추적한다.

 

각자의 문제 해결 방식을 채택해 가는 과정도 차이가 있었다. 각자 누구의 입장에서 하루를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준영은 강식의 집에 방문하여 3년 동안 아들을 잃고 고통 속에 살았던 강식의 자취를 확인한다. 강식의 시간표는 아들이 죽은 후 고통 속에 정지되어 있었다. 3년이 지났지만 강식의 집은 아들 하루의 학용품과 침구가 그대로 놓여져 있었다. 준영은 그 손때 묻은 방안의 물건들을 보면서 자신이 딸의 죽음을 눈앞에 목도하고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괴로움을 느꼈던 것처럼, 중환자실 병상에서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강식의 아픔을 공감하고 동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가 3년전 자신이 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강식의 아들 하루의 심장을 자기 딸의 몸에 이식하면서 식물인간 상태였던 강식의 서명을 위조한 것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면 민철은 아기를 임신하고도 그 사실을 숨길 수 밖에 없었던 가난한 아내에 대한 연민에 집중한다. 민철은 우연히 아내가 쓴 달력을 발견하는데, 아기를 유산시킬 수 있는 마지막 날짜가 있었고 자녀 낳기를 반대하는 민철에게 임신 사실을 말해야 할지 아니면 아이를 지워야 할지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갈등하던 아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민철 역시 강식의 아들 하루의 죽음에 책임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과오에 대한 반성과 강식에 대한 미안한 감정보다는 임신한 아기를 낳을 것인지 지울 것인지 하루하루 고민했던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연민이 그를 철저한 응징과 보복으로 인도했다.

 

그러한 갈등 구조는 점차 강화되더니 최초의 준영-민철 Vs 강식의 대립구조는 준영-강식 Vs 민철의 대립구조로 변화된다. 그리고 클라이막스 부분에서는 강식을 눈앞에 두고 살리려는 준영과 죽이려는 민철의 준영 Vs 민철 대립구조의 갈등구조를 보여준다.


그러한 대립 구조는 민철이 휘두른 칼에 준영이 찔려 죽음을 맞고, 준영의 딸 은정을 강식이 만나는 것을 통해 극적인 전환을 맞게 된다.

 



강식은 은정이 준영의 딸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은정을 바라보며 한없이 낯익은 어떤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하루의 심장이 준영의 딸 은정의 가슴 속에서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하루는 죽은 것이 아니라 은정의 가슴 속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은정은 마지막에 말한다. 자신은 은정이기도 하며 하루이기도 하다고.

 

드라마를 볼 때 처음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은정이는 왜 아버지 준영이 죽고 있는데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던 걸까? 나중에야 그 의문은 풀리게 되었다. 그것은 은정이게 준영과 강식 모두 아빠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드라마의 키는 강식이 쥐고 있었다. 세 주인공에게 주어지는 하루는 강식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시간만큼 존재한다. 강식이 죽는 순간 하루는 끝나고 똑같은 하루가 반복된다. 최초에 이 드라마에서 관객들은 준영의 딸을 살리는 것이 중요했다. 그 다음에는 민철의 아내 미경을 구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제일 핵심적인 인물은 강식이었다.

 

애초에 준영은 주어진 하루가 자신의 딸 은정을 살리기 위해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민철은 아내 미경을 살리기 위한 시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죽었던 하루가 자신의 아빠 강식을 구해내기 위해 만들어낸 기회이기도 했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고통스런 하루란 족쇄는 강식이 보복과 원한을 끝마치기로 한 순간 마법처럼 풀려나갔다.

 



영화<하루>에서는 하루가 인물, 사건, 배경, 모든 부분에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시간으로서 하루는 딸 은정을 살릴 수 있는 기회이자 가족이 죽는 모습을 날마다 경험해야 하는 끝나지 않는 고통이기도 했다. 그런데 고유명사로서 하루는 아무 잘못 없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강식의 아들의 이름이자, 그 아이가 심장을 이식하여 살고 새로운 생명을 얻은 은정의 두번째 이름이기도 했고, 살아난 미경의 뱃속에 있는 아이의 이름이기도 했다.

 

감독은 이 하루라는 시간이자 사람의 이름들로 하여금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모든 등장인물 자식들의 이름이 하루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던질 수 있는 존재가 하루라는 사실은, 인간에게 주어진 존재적 무대가 오직 하루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백년의 대계를 꿈꾸고 10년 앞을 내다보고 장기적 전망을 세운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영원히 하루 현재 밖에 없다. 과거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다. 미래는 미지의 시간이며 신의 영역이다. 오직 하루라는 시간 안에서 지금이라는 순간에 충실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영화<하루>는 전문가들에게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으며, 작품을 본 관객들 역시 작품 평가에 대한 말을 아끼고 있다.

 

영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는 쪽은 영화<하루>가 장르적 작품 규범을 준수하지 않아 구성면에서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말한다. 스릴러물이 갖는 스피드와 반전에 반전을 기하는 전개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이 영화 중반 이후부터 무너지고 동적 설계가 인물 심리 묘사와 급반전으로 돌아서서 후반부의 지루함이 마치 3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는 평이었다.

 

그리고 식상한 타임루프 소재를 끌어들였다는 비판도 있었다. 타임워프나 타임슬립, 타임루프와 타임리프와 같이 시간을 소재로 쓰는 영화는 복잡한 시간 구조와 허무맹랑한 사건에 리얼리티와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보다 구성적 치밀성과 강한 모티브를 가져야 하는데 이 드라마의 후반부 결론 부분은 논리적으로 비약이 심해 드라마적 결말구조로서 대충 얼버무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시각이었다. 관객들이 그 결론에 이를 때까지 감정이 따라갈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영화<하루><사랑의 블랙홀>이나 최근 한국에 소개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엣지 오브 투모로우>처럼 타임로프를 활용한 영화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시간적 소재를 활용한 영화라고 해서 다 식상한 것처럼 영화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은 영화나 소설과 같은 장르만이 가질 수 있는 시간예술의 특권이다. 그에 비해 많은 영화와 연극에서는 이러한 시간적 소재를 잘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릴러물들의 보복과 응징,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유사패턴과 때 아닌 법정드라마와 의학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드라마 시장의 유사 동일성이 식상함에 있어선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까?

 

정말 참다운 비평이라면 이 작품에 타임루프라는 시간적 소재가 쓰였다는 사실 그 자체를 갖고 비판을 하진 않는다. 유사한 소재와 장치를 통해 주제 의식을 어떻게 구현하며 줄거리를 어떻게 완성도 있게 구현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영화<하루>에선 타임로프라는 장치를 영화를 이끌어 가는 소재로서 매우 잘 구현했다. 자신의 아들이 죽고 마치 시간이 정지된 상태처럼 매일 하루가 고통의 연속인 강석의 심리적 시간 인식의 틀을 시간의 구조로 만들어 냈다.

 

이것은 세월호 사건 이후 지금도 그날의 악몽 속에서 하루하루 동일한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단원고 학부모들의 심정을 보면 그 하루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세월호 사건이 언론에 등장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 오래 전 이야기인데 아직도 세월호 이야기를 하냐고 말을 한다. 그러나 자식을 보낸 그 부모들에겐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2014416일 이후 고통스런 하루가 반복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강석이 아들 하루를 잃어버린 작품에 등장한 3년의 시간과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시간은 동일하게 3년 전이다. 조선호 감독은 영화<하루>를 통해 아직도 그날의 고통 속에 정지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세월호 부모들에 대한 연민과 아픔을 카메라에 담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작품은 엄밀히 얘기해서 스릴러물이 아니다. 스릴러적 요소와 환타지적 요소를 가미한 추리적 드라마에 가깝다. 영화 평가는 결국 영화를 보기 전에 자신의 기대치와 실제 영화의 역량에 따라 결정되는데, 영화<하루>를 스릴러로 접근하느냐 <드라마>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평가가 극히 달라질 수 있다.

 

영화<하루>를 드라마로 보면, 이 영화는 상당히 괜찮은 영화로 볼 수 있다. 상당히 절제된 시선에서 가족들을 사랑하는 배우들의 내면연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연기본좌 김명민이나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변요한, 배우로서 재발견하게 된 유재명의 연기는 마치 가까운 가족들을 실제 잃어버린 가장의 아픔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다만 자신의 가족에 대한 헌신적 사랑이 사회적 사랑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가족적 선이 울타리를 넘어 공공의 선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한국적 사회의 한계를 드러내주고 있어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나의 하루는 단지 나만의 하루가 아니다. 우리는 하루를 많은 이들과 공유한다. 우리는 나를 주인공으로 다른 사람들을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생각하며 하루 동안 영화를 찍는다. 그러나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인생의 주인공이며 하루의 주역이다.

 

그 모든 사람들이 이 하루를 보람차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도록 서로 훌륭한 조연과 엑스트라 역할을 해주고 싶다. 물론 나는 주인공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하루 속에서 좋은 조연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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